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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

 

조선시대에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지낸 무신이다.(1545년~1598년)

 

 

 

 

간단히 요약문

 

이순신은 조선시대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지낸 무신이며

그는 1545년에 태어나 1598년에 사망했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자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전선을 제조하고 군사력을 확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옥포 노량 당포 당항포는 연전연승을 이어갔다.

한산도와 부산포에서는 적을 무찌르고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는 조정의 명령을 거역한 혐의로 체포되어 문초를 당했다.

원균이 정유재란에서 대패하자,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적함을 추격하기 위해 다시 임명되었으나

결국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순신 장군 활동과 업적

 

이순신 가문은 4대 때 조선왕조로 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 조인 이변은 영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이 조광조 등 지치주의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이후 아버지 이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 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나중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유년 시절 어머니 변 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변 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하게 했다.

이순신은 위로 이희신, 이요신 두 형과 동생 이우신이 있어 총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회람자인 신자 위에 삼황오제 가운데 복희씨 요 순 우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였다.

이순신은 4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서 뛰어났고 시재에도 특출하여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면서도 자애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후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략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선두에 앞장서서 장졸을 지휘함으로써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이순신의 인자한 성격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부모님을 일찍 잃은 조카들을 친아들처럼 사랑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시골집은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 백암리인데 어릴 적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것 같다.

같은 마을에 살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어려서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어렸을 때 얼굴 생김새가 뛰어나고 기풍이 있어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않으려 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면

나무를 깎고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어른들도 꺼렸고, 굳이 이순신의 문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아서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을 타고 활 쏘는 것을 좋아했고 글씨를 더 잘 썼다.

28세 때 처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왼발을 다쳐 실격됐다.

이후에도 무예를 계속하여 4년 후인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 동구비보권관에 보직되었다가

이듬해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을 역임하였고

1586년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진로는 순탄치 않았다.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었는데

이때 국방 강화를 위해 군사를 더 보낼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은 곳에 후인의 침입을 받아 적은 군사로 막을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이순신의 죄라며 문책했다.

그러나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의 판결에 따르지 않고

첨병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며 마침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중형을 면했지만 최초로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이광에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이 되었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로 승진

또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진도군수 등을 지내다가 47세가 되던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을 근거지로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 침략에 대처하고

나아가 군량 확보를 위해 해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제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일본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해진 것은 이틀 후였다.

이날은 국기일이어서 공무를 하지 않았으나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 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때 부산 앞바다 방어를 맡은 경상 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 좌수사 박홍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도착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쳤다.

또한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 즉시 전선을 정비하여 임전 태세를 갖추었으나 적을 공략하기 전에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이순신 휘하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훈련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었으며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령했더니 이때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모두 85척 등 대형 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했으나

연합 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옥포에 정박 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해상에서 공격해 올 줄 모르고 육지로 올라가 불을 질러 약탈을 자행하고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치려 했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 수군의 포화와 화살에 격파당했고 많은 왜병이 궤멸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이순신의 첫 해전으로 기록이다.

옥포 해전이 있은 다음 날에는 고성 적진포에 정박 중인 왜선 13척을 쳐 불태웠다.

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던 이순신은 일본군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등지로 진출했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 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거북선을 선두로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이끌고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전함에 올라 적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조선 수군은 곧 일본군이 정박 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해 있었으며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나란히 정박해 있었다.

이순신은 공격이 쉽지 않자 이들을 바다로 유인해 섬멸할 계획을 세웠고

그 작전 계획은 적중해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했다.

이 전투에서 군관 나대용 등이 다쳤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히 인정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에 정박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잔교에는 일본 수군장 가메이, 구르시마 통원이 이끄는 큰 배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해 있었다.

일본 수군은 성내 밖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고 조선 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 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며 왜장 구루시마가 사망하였다.

당포해전 다음 날 이순신 함대는 가박지인 창신도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했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였고

발선하려 할 때 전라우수사 이옥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오자 반갑게 맞이하였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 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했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순신과 이억기의 연합함대는 곧바로 길을 돌려 당항포로 향했다.

당항포 내만에는 왜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 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 전선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했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처럼 이순신은 해전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에 승계됐다.

이후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 가덕에 출몰하는 일본군을 격멸하기 위해

우수사 이옥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 조직을 통첩하였으며

7월 6일 전라좌·우수 군이 일제히 출동한 후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 전선 7척과도 합류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했고

견내량에는 와키자카 등이 이끄는 큰 배 36척, 중선 24척, 작은 배 13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순신은 개의 내량이 지형이 좁아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약간의 판옥선으로 일본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치고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해 층각선 7척, 큰 배 28척, 중선 17척, 작은 배 7척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와키자카의 가신, 와키사카사베에, 와타나베를 비롯한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에게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은 다시 전진해 안골포 적선을 격파했다.

와키자카와 합동 작전을 하려던 구키, 가토 등 일본 수군장 들은 와키자카 수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교대로 하루 종일 적선을 공격하여 큰 배를 거의 분멸시켰다.

제3차 출동 결과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 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보냈다.

공격 전날에는 밤새워 원균, 이억기와 작전 회의를 갖고 부산포 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에 이르렀을 때

왜의 큰 배 여러 척이 아군 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여러 척의 적선을 무찌르고 척후선을 부산포로 보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500여 척이 선창 동쪽 기슭 해안에 나란히 정박해 있으며 큰 배 4척이 초량 쪽으로 나와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했음을 알게 된 많은 장군들은 부산포로 깊숙이 들어가기를 꺼렸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를 높이 들고 진격을 촉구하였다.

우부장 정운 등이 앞장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큰 배 4척을 공격하여 불태웠고

뒤에 있던 여러 전선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뉘어 정박 중인 일본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밀려 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나

아군이 돌진하여 맹공을 가하자 배 안과 성내, 동굴 안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에 올라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해 종일 교전을 벌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했다.

날이 밝자 이순신은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했다.

이 전투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이 컸고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녹도만호의 정운이 전사했다.

1593년에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로 진을 옮겼고, 이어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훗날을 대비하여

군사 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생업 보장, 산업 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 간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넘어간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을 기뻐하며 싸움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원균의 모략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고니시의 부하이자 이중간첩인 요시라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가토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너오므로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리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순신은 이것이 적의 흉계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동했지만

가토는 이미 며칠 전 서생포로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내쫓으려는 자가 있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어서 이를 빌미로 먼저 모함하게 되었다.

또한 그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사람은 한층 노골적인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원균의 상소만 믿고 격분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시켰다는 죄를 들어 벌을 내려 원균에게 그 직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약 한산도를 잃는 날에는 호남지방도 지킬 수 없습니다."

라고 간청했으나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들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으니 이순신을 잡으라는 명령만 내렸다.

이때 이순신은 전선을 이끌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본영의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개나 되었다.

이때 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어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라고

반대하는 치계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가는 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 통곡하며

사또께서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다 죽었어요라고 말했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지만 그런 공로도 아랑곳하지 않고

1차 심문 때 한 달여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깎아내리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조목조목 고했다.

1차 심문에서 몸이 쇠약해지자 우의정 정탁의 적극적인 변호로 추가 심문을 받지 않게 되었고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도중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에서 나 같은 일을 경험할 수도 있겠느냐.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한탄하며 잠시 들러 성복을 마친 뒤 슬픔을 딛고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그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 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순신이 공들여 키워온 무적함대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초계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었던 건 그냥 수군인데 그렇게 됐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된 거야."라며 통곡했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왕은 비국대신을 불러 의논했으나

황급히 즉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병조판서의 이한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왕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을 빼앗아 모함한 죄, 방관하고 거리낌 없는 죄 등

여러 죄목을 씌워 죽이려 했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것이 궁했는지 교서에서

"지난번에 경의 벼슬을 빼앗아 죄를 지은 것은 또 남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고

그래서 오늘 패전 욕을 보게 되었으니 그 무슨 말을 하겠느냐"라고 얼버무렸다.

통제사로 재임용되어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지만 남은 군사 120명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우기로 결심했다.

명량해전에 앞서 장병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뒤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는 다시 통제사로 부임한 후 첫 번째 대첩이자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였다.

명량대첩에서 제해권을 다시 찾아 보화도를 본거지로 삼았으며

이듬해 2월 고금도로 영을 옮긴 뒤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넓게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도 판매하였다.

이에 따라 장병들이 다시 모여 난민들도 줄지어 돌아와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고

군진의 위용도 이전 한산도 시대에 비해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단기간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개인적 능력 때문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해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피하려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나는 적선을 향해 맹공을 가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앞장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슬프게도 적의 유탄을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로 급하니까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냥 통곡하려 했지만

이문욱이 옆에서 곡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숨겨 보이지 않게 한 뒤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촉구했다.

병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아직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고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고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라고 외쳤다.

부음이 전파되자 온 백성이 애통했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도

이순신을 평하며 유경천위지재 보천욕일지공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이순신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고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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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 순서 조선왕조 계보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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