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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22대 왕 정조는 지난한 여정을 거쳐 왕위에 올라
갖가지 개혁 정책 및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재위기간에 추진했던 각종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정조 왕을 알아보자
조선후기 제22대 왕. 제위기간 1776 ~ 1800년이다.
이름은 이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 영조의 차남인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 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비는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이다.
활동과 그의 업적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었다가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 대리청정을 하다가 이듬해 영조가 죽자 25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서
여러 위험 속에서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개유과'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 건륭문화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그리고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한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였다.
이어 그의 총애를 빌미로 세력정치를 벌이던 홍국영까지 몰아내고 친정체제를 구축한다.
정조는 빛바랜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문형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여 정권의 핵심 기구로 키워 나갔다.
우문지치와 작성지화를 규장각의 양대 명분으로 내세워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 인재를 모아 참상·참외의 연소 문신을 선발, 교육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해 온 사고전서 수입에 힘쓰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써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곧이어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사서, 삼경 등 당판 서적 수입 금지 조치도 이처럼 자기 문화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 후기 사회에 맞게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 작업을 계승·완결하였다.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국, 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이 그 결과였다.
이와 함께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하여 훗날 홍재전서(184권 100권)로 간행되도록 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공고히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벽파로 남았고
정조의 정치 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면서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1794년 들고 나온 문체반정이라는 문풍의 개혁론은 이런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됐다.
그는 즉위 초부터 문풍이 세도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 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를 본격적으로 내세운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이자
탕평책의 구체적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육경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했을 뿐만 아니라
예론에 있어서도 왕자례부동사서를 주장하며
왕권 우위의 보수적 사고를 가진 남인학파 내지 남인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동례를 주창하면서 신권을 주장하는 노론 속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학자적 소양은 여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신설하여 북학파의 종장인 박지원의 제자들
즉 이덕무, 유덕공, 박제가 등을 등용하여 그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검서관의 신분은 서이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 이념에 편승하여
서얼통청운동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응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정조는 이처럼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받아들여
그 학풍을 특색 있게 장려하여 문운을 진흥시켜 나갔다.
한편으로는 문화 저변 확대를 도모하고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도 적극 지원했다.
이곳에서 인왕산을 중심으로 경아전이 주축이 된 가운데
이하 계층의 위항인들이 귀족 문학으로 성립되어 온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그들만의 옥계 시사를 결성하고 공동 시집인 풍요 속선을 발간하는 등
성관을 이루어 중인 문화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훗날 필운 대풍월의 효시를 보기도 하였다.
정조대 시기를 조선시대 문예 부흥기라고 칭하기도 한다.
문예 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 화이론에 기초한 조선중화의식이 고취되었고
이에 따른 북벌론의 대의명분 아래 조선 성리학 이념에 기초한 예지 실현이라는 당면 과제를
국민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룬 자부심과 조선문화의 독자발전에 있었다.
이러한 조선 고유문화 현상의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문화 제반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예컨대 그림에서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로 동국진체라는 국서풍이 그것이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 기인하는
문화정책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후기 도미적 성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케 한 것이었다.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는데
이 밖에도 일성록 편수, 무예도보통지 편찬, 장용영 설치, 형정 개혁, 궁차징세법 폐지, 자휼전칙 반포,
서류소통절목 공포, 노비추쇄법 폐지, 그리고 당시 정치 문제였던 서학에 대해 정학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정조는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 문제도 고심했다.
외할아버지 홍봉한이 노론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으나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하며 사면해야 하는 갈등을 겪었다.
또 아버지를 장홍세자로 추존하였다.
양주 배봉산 아래 있던 장홍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 아래 이장하여 현륭원이라 하고 용주사를 지어 원찰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어머니 혜경궁 홍 씨에 대한 효도를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완수하였다.
옛 수원 관아가 있던 화산에 현륭원을 조성하고 대신 팔달산 기슭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어머니 환갑잔치를 화성행궁에서 열었다.
권신의 뿌리가 공고한 서울에서 벗어나 신도시 수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적 구상을 가진 것이었다.
왕의 말을 '교'라고 표현한 데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왕은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고 큰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였다.
조선이 성리학 이념을 채택하고 우문정치로 표현되는 문화정치를 표방한 지
400년 만에 명실상부한 전형적인 학자 군주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권 10 상자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로 간행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왕이자 스승인 군사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지위를 확보하고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