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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4 - [분류 전체 보기] - 김유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
▶ 이사부 장군에 대하여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하여 신라 영토에 편입시킨 인물이며
삼국시대 신라의 실직주 군주 병부령 등을 역임한 관리, 장군, 정치가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 이사부 출신 및 가계
이사부는 신라 17대 왕인 나물왕의 4대손이자 훼부 출신이다. 정확한 생년과 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사부라는 이름은 태종 혹은 이정이라고도 표기되는데 태는 이끼를 말하므로 태종을 훈독하면 잇부가 된다.
단양적성비에는 이사부 일본서기에서는 이질부례로 표기되어 있다.
이사부의 성은 삼국사기에 김 씨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서는 박 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사부가 나물마립간의 4세손이라면 그의 성은 김 씨로 보는 것이 옳다.
신라에서 성에 대한 기록에 혼란이 있는 경우로는 박제상의 사례가 또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박제상을 김재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것은 당시 신라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연구도 있다.
후대에 성을 붙이면서 부계나 모계에 따라 일관성 없이 성을 붙였기 때문이다.
▶ 자세한 활동과 업적들
505년 신라에서는 군현제가 실시되어 처음 실직주가 설치되었다. 이사부는 이때 군주가 되었다.
512년에는 우산국을 점령하였다.
우산국은 지리적인 이유로 신라에 귀복 하지 않았고 주민들이 거칠어 힘으로는 정복할 수 없었다.
이사부는 계교로서 항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가득 싣고 해안을 내왕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들은 끝내 항복을 하였다.
541년 병부령이 되었다. 당시 병부령은 단순한 병부 책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등 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 요직 중 하나였다.
이후 562년까지 정치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545년 왕에게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왕은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하고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하는 등 양국의 충돌이 이어졌다.
이 틈에 이사부는 이 두 곳을 공략하여 점령한 뒤 성을 증축하고 1,000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후 금현성 탈환을 위해 다시 침입한 고구려 군대를 격파하였다.
최근 발견된 단양신라적성비에 따르면
549년 전후에 이사부는 파진찬두미와 아찬비차부 무력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 지방을 공략하여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
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때 사다함이 5,000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으로 달려가 백기를 세우자 성 안의 모든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본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낙동강 하류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이후 이사부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흥왕 재위 20년대 말에 세운 순수비를 봐도 이사부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그에 이어 크게 활약한 거칠부가 가장 먼저 나와 있다.
이를 보면 그가 진흥왕 재위 20년대 중, 후반 때에 은퇴했거나 사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간단히 정리
이사부는 우산국 지금의 울릉도를 신라땅으로 만든 장수이다.
이것은 그의 공적을 이야기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신라의 성장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이사부는 영리하고 그 지혜로 권력의 중심을 잡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사부는 545년 국사 편찬을 제안하여 거칠부들이 국사를 편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진흥왕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을 도왔던 이사부 장군은
진흥왕을 도와 한강 상류 지역까지 신라 영토를 넓혔고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공방을 벌이다 지친 틈을 타 두 성을 빼앗은 전력도 있다.
이러한 활약은 신라가 함경도 남부까지 진격하는데 기여하여 반란을 일으킨 가야로 출정하여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소백산맥 동쪽에 신라의 지배권을 확립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