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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유신 장군 동상
신라 김유신 장군 동상

 

 

 

 

2023.02.07 - [분류 전체 보기] - 이사부는 우산국 가야 정벌한 신라장군

 

이사부는 우산국 가야 정벌한 신라장군

▶이사부 장군에 대하여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하여 신라 영토에 편입시킨 인물이며 삼국시대 신라의 실직주 군주 병부령 등을 역임한 관리, 장군, 정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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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어떤사람

 

김유신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우며 신라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한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이며 충신이다.

595년에 태어나 673년에 사망하였고 신라 화랑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활동과 업적에 대한 요약

 

증조부는 532년 금관가야의 구난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 아버지는 서현이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 왕족 김 씨와 구별하여 신 김 씨라 칭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만명부인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 아버지는 숙흘종이다.

숙흘종은 만인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그것은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 비록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어 있었지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정도의 대귀족은 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해지는 것은 629년 34세 때부터 나타난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의 무다성을 공격했으나 1차 접전에서 패배해 전의를 잃고 있었다.

이 전투에 그는 중당당주로 출전하여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크게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642년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김춘추가 종래 적대관계에 있던 고구려로 청병하러 가기 전에 협상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성에 대해

김춘추는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나누었다.

644년에는 소판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 요충지인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에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들도 만나지 못한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663년에는 백제 부흥을 도모한 백제 유민과 이들을 지원한 왜의 연합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 유민들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가르쳐 평정하였다.

661년 6월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

이 원정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고 병력이 떨어진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고자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 수송 작전을 펼쳤으며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해 정월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신라와 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대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해져 병으로 원정에 참여할 수는 없었고 왕경에 남아 왕까지 원정을 떠난 신라 내 통치를 담당했다.

647년과 648년 전투는 압량주군주로 그 일대 전투를 지휘한 형태였으나

649년 전투는 백제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해 중앙군에 편성된 군단을 지휘하였다.

태종 무열왕 즉위 이후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태종 무열왕 즉위 이듬해 관등이 대각간으로도 나타난다.

그해 10월 태종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었고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해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반란세력의 장은 상대등비담이었다.

이들은 명활성을 거점으로 월성 왕족 세력을 공격했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었던 유성의 추락이 월성 쪽에 있어

왕실 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때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측 군중의 사기를 북돋아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후 상대등이 된 알현도 전통적 신라 귀족이었다.

반란 진압으로 전통 귀족의 힘도 컸음이 분명하다.

660년에는 백제군 결사대를 격파하기 위해

당군과의 합류 지점에 늦게 도착한 것을 빌미로 당 소정방이 신라 장군의 참수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그는 단호하게 먼저 당군과 결전하겠다고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깬 바 있다.

연이은 출정으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앞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간다든가

혹한 속 행군에 지친 군사들 앞을 어깨를 내밀고 앞장서다든가 아들 원술이 당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달아나자

왕에게 참수형을 내리라고 제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것 등은 스스로를 엄단해

신라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노력한 것의 단면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에 묻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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