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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1 - [분류 전체 보기] - 이이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
신사임당 소개
조선전기 화가이며 자리도, 초충도, 노안도 등의 작품이 있다.
본관은 평산이고 아버지는 심명화 어머니는 이사온의 딸이다.
남편은 증좌한성 이원수이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시, 그림, 글씨에 능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내용요약
1504년에 태어나 1551년까지 살았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시, 그림, 글씨에 능한 예술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친정에 살면서 자유롭게 자녀 교육이 가능하였고
신사임당도 남편의 외조 속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생동하듯 섬세한 사실화, 고상한 정신 과 기백을 드러내는 글자는 탐낼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개척한 여성이다.
오늘날 훌륭한 어머니 또는 여성으로 불리운다.
살아온 이야기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밖에 시입니다, 임사재라고도 하였다.
당호 의미는 중국 고대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뜬다는 것으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 강릉 북평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신명화는 신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이사 온이 어머니를 아들 뒷바라지로 여겨 출가 후에도 줄곧 친정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이에 신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과 함께 학문을 배우고 부덕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랐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19세에 덕수 이 씨 이원수와 결혼했다.
신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는 친정이었기 때문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시집의 기반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했으며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수년간 살았다.
가끔 친정에 가서 독거 어머니와 함께 지내거나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1541년 38세에 시집살이를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 수진방에 살다가 1551년 봄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올여름 남편이 수운판관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여성상인 태임을 본뜬다는 의미에서 당호를 만들었는데
신사임당을 평가한 사람들 중에는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마저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 학자을 키운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은 온전한 예술가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킨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부적 재능과 함께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신사임당의 재능은 이미 7세에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민감한 감수성을 지녔으며 예술가로서 대성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치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새어 눈물을 흘렸다거나 강릉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새운 것 등은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격만큼 그림, 글씨, 시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요 화제였다.
마치 움직이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고 여름 햇살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로 생각하고 쪼아 종이가 찢어질 뻔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림에 후세 시인 학자들이 발문을 달았지만 한결같이 극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글자에서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에 간 윤종의는 신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썼다.
그래서 신사임당의 글씨를 진심을 다해 그린 그림이 심오하고 품위 있고 청결하며 조용하여
부인이 더욱 그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극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바로 말굽과 잠두라는 체법에 따른 본격적인 글씨였다.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대여 명종 때 어숙권은 패관 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사람들이 안견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떻게 부녀자 그림이라고 경박하게 생각하느냐
또 어떻게 부녀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탓할 수 있느냐고 극찬하였다.
신사임당의 여섯 폭 초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신사임당의 넷째 여동생 아들 권처균이 이 여섯 폭 초서를 얻은 것을 그 딸이 최대해로 출가할 때 가져가서
최 씨 가문으로부터 대대로 가보로 전했다.
그런데 영조 때 이웃 마을 사람들에게 유혹되어 이를 빼앗겼으나 어렵게 되찾았고
이후 최 씨 집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이후 두산동 최 씨 집안에서 보관하던 여섯 폭의 초서는 1971년 강릉시로 인도되어 율곡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여섯 폭의 초서는 신사임당 초서 병풍인데 19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윤종의 에 의해 판각된 것은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신사임당이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문 중요한 동기는 환경이었다.
즉 첫째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 완전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사임당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하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통 큰 남자였다.
먼저 혼인 전 환경을 보면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끼친 외할아버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 신사임당에 전수되었다.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서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학문을 배웠으며
출가 후에도 부모님과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인 바쁜 일이 없었다.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신사임당은 천부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서울 시가로 향할 때 지은 유대관령망친정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사친 등의 시에서
어머니에 대한 신사임당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실한지 알 수 있다.
이는 어머니의 세계가 신사임당에 그만큼 영향이 컸음을 보여준다.
여성이 출가한 후에는 시집만을 위해 요구한 유교적 규범 중에서도 친정을 그리워하며
친정에서 잘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사임당의 예술 속에 드러나듯 거짓 없는 본래성을 정직하고 순수하게 추구한 것이다.
신사임당의 예술성을 더욱 높인 것은 남편이다.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부모의 도량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재능을 인정했다.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고 대화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 것이다.
신사임당 시당숙 이기가 우의정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놀닐었다.
1545년 윤원현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이 크게 노하게 한 사람이다.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선한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 탐하는 삼촌의 영광이 오래가지 않음을 상기시키며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했다.
이원수는 이런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훗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신사임당 자녀들 중 훈도와 감화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셋째 아들 이이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적기 를 썼는데
이이는 여기서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깨끗한 지조 순효한 성격 등을 상세히 밝혔다.
신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 스승이었고
아들 이우와 장녀 이매창은 자신의 재능을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