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보장왕의 정의

 

삼국시대 고구려의 마지막 제28대 왕이다.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장 또는 보장이다.

제위기간은 642년에서 668년이고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요약 내용

 

고구려의 왕명은 대부분 시호인데 보장왕은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영류왕의 동생 태양왕의 아들이다.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해 왕으로 올랐기 때문에

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의 실권을 갖지 못했다.

즉위 초에는 당과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사절을 교환하여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당 태종의 팽창 정책으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적대관계를 계속하여 자주 신라를 공격하고 나아가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왜와의 관계를 재개하여 신라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당과 밀착하였고

당나라는 신라를 감싸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 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이에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 준비 끝에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는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말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정면 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하여 고구려를 피폐하게 하였다.

665년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남생 형제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 내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기회를 엿보던 당나라는 667년 신라와 연합하여 다시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때 육군은 요동 지방의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당나라에 투항한 남생과 합류하여 평양성으로 진격하는 한편

수군은 대동강구를 거쳐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였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보장왕의 직접 지휘 아래

남산, 남건 형제가 분전하였으나 패배를 거듭하였고 드디어 이듬해 9월 평양성까지 함락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은 당나라에 붙잡혔고

이후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 부흥을 꾀했다는 이유로

사천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왕 순서도 보러가기

 

조선왕 순서 조선왕조 계보 가계도

조선을 알아보자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에서 존재했던 왕조입니다. 이 왕조 시기에 양반 관료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정치를 수행하였으며, 농업 중심의 자연 경제

yc9342yc.com

 

자세한 이야기

 

보장왕은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왕위에 있었으나 연개소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의 실권을 갖지 못했다.

재위 기간 동안 국내적으로는 천재지변이 많았고

643년에는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에 요청하여 도사를 초빙하는 등 도교 진흥책을 사용하였다.

고구려 종교계에서 기득권을 가진 불교 세력의 반발이 거세 보덕과 같은 승려들은 650년 백제로 망명하기까지 했다.

당시 도교 진흥책에 대해서는 도교를 믿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연개소문의 독재권력을 지탱하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한편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제 관계는 즉위 초에는 당과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사절을 교환하여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 태종의 팽창정책으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적대관계가 지속되어 자주 신라를 공격하고 나아가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며

바다를 건너 왜와의 관계를 재개하여 신라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와 밀착하였고 당나라는 신라를 감싸 고구려에 대해 신라 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 준비 끝에 연개소문의 영류왕 살해를 규탄하는 구실을 내걸고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스스로 진두지휘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은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하자 이후 작전을 바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정면 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해 고구려를 피폐시키기로 하고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그런데 고구려 침공에 앞장섰던 당 태종이 649년 사망하면서 당과의 관계는 한때 소강상태를 맞았으나

당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도 고구려 정복의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고구려는 고구려 대로 654년 거란족을 공격하고 655년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는 등

당과 우호관계에 있던 세력을 공격하여 당을 자극하였다.

이에 655년 당나라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다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평양성까지 침입해 온 당나라군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유민들의 부흥 운동이 전개되자 신라와 당나라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해 당나라와의 직접 충돌은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663년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부여풍이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이 운동이 실패로 끝난 데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이듬해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 형제간에 내분이 일어나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정토는 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 내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다시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각지에서 분전하였으나 패배를 거듭하였고

마침내 668년 9월 평양성까지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은 당에 붙잡혀 정치의 책임이 왕에게는 없다며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에 임명되었다.

다음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격렬한 반당운동으로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고

사실상 한반도 지배를 포기한 이듬해인 677년에는 요동 지방 전체를 지배하는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임명되면서 당나라에 붙잡힌 많은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갔다.

이는 당나라가 한반도 포기에 따른 요동 지역의 동요를 막기 위해 취한 조치였으나

요동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 부흥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이 발각되어 681년 공주로 유배되었다가 682년경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왕 순서도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