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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7 - [분류 전체 보기] - 박혁거세 삼국시대 신라 제1대 시조왕
▶김춘추는 누구
신라왕실의 최초 시호와 묘호를 받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9대 태종무열왕이다
▶ 김춘추에 대한 핵심요약
신라 제29대 왕 김춘추(604~661, 재위 654~661)는 진지왕의 손자이자 이찬 용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고 부인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즉 후대 문명부인이다.
관직으로는 선덕여왕 때부터 두드러져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와 당나라에 외교 임무를 띠고 있으며
자신의 사위가 맡고 있던 대야성이 백제군에 떨어졌을 때
사위와 딸이 죽임을 당하자 백제 정벌의 비원을 품는다.
진골신분의 불리함을 딛고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 중망을 받던 상대등의 알현이 꺼려지는 데다
여럿이 김유신을 등진 춘추에 기울어 51세의 나이로 등극하였다.
재위 7년째인 660년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 정벌의 비원을 이뤘으나
고구려까지 통합하는 삼국통일의 대업은 토대를 마련하는 선에서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이듬해 죽었다.
무열왕이라는 시호와 더불어 신라 왕실에서 유일하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부여받았다.
▶ 배경과 역사적 이야기
김춘추는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제세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기고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많은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 계승자로 상대등 알천을 천거하였다.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제세의 영걸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고 즉위하여 신라 중대 왕실의 첫 왕이 되었으며 당시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전부터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유신의 누나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하고
새로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 정치적, 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진지왕계인 김영춘,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이들의 배후 세력으로 필요했다.
금관군주 김구혜계인 김소현, 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이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러한 상호 이익에 기초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 왕실의 진골 귀족 내에서 새로운 신귀족 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귀족 집단의 반발을 받았다.
선덕왕대 중반까지는 적어도 신귀족과 구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642년 신라의 서쪽 요충지인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되면서
김춘추의 사위인 금품석불의 죽음은 김춘추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김춘추에게 대외적인 외교활동을 펼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풀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구하러 갔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한 이 외교는
진흥왕 때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 유역의 영토 반환 문제로 결렬되었고
오히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됐다가 겨우 탈출했다.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합을 바탕으로 김춘추는 647년에 일어난 옛 귀족 세력인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구귀족집단의 대표자인 비담이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있는 신귀족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오히려 김춘추, 김유신계 신귀족세력에 의해 30여 명이 숙청되면서 분쇄되고 말았다.
이 정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자 신귀족은 구귀족과 일시적으로 제휴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구귀족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 옹립 과정에서 김춘추, 김유신계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덕여왕대에는 김춘추에 의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외교활동과 내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648년 당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의 친당정책은
650년 신라가 중고시대 전 기간 동안 계속 사용해 온 자주적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를 신라 연호로 채택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김춘추는 귀국 후 왕권 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다.
649년 중조의 관제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 실시 품주의 집사부 개편 등 한화정책이 그것이다.
김춘추에 의해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 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를 대비한 정지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친다 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해 신장된 신귀족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김춘추는 진덕여왕 사후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됐다.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한 구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의 알현을 배제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즈음하여 그의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된 만큼 화백회의에 의해 추대되는 형식을 취했다.
이로써 구귀족에서 신귀족으로의 권력 이양과 왕위 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무열왕으로 즉위하던 해에
먼저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방부격 60여조를 개정하는 등 율령정치를 강화하였다.
655년 원자인 법민을 태자로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아들 문왕을 이찬으로 노차 또는 노차를 해찬으로 인태를 각찬으로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림으로써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로
658년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로 새로 임명하여 직계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 상대등에 임명하여 왕권을 보다 전제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태종무열왕 즉위 전 중고시대 상대등은 귀족회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 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다.
이에 반해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후 왕의 측근 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 세력의 대표라는 본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 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신라 중대 사회에서는
전제 왕권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행정 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처럼 친당외교를 통해 당을 후원세력으로 삼았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킨 뒤 고구려, 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655년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나라 정명진과 소정방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59년에는 백제가 종종 신라의 변경 지방을 침범하기 때문에
당나라 군사를 요청하여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 정벌을 추진하였다.
지난 3월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 13만 명이 백제를 공격했고
5월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정병 5만 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 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의 항복을 받아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었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 통일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비성 함락 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의 1만 명과 김인태의 7,000명의 군대에 머물며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 무열왕은 스스로 백제 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등 20여 개의 항복을 받았다.
11월 백제에서 귀환하여 백제 정벌에서 전사한 자와 전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었다.
그리고 항복해 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 신라 칠중성을 공격해 왔다.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술천성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인 대사 동타천이 효과적으로 방어하였으므로 대나마로 관등을 높였다.
그해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 지역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재위 8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59세였다.
영경사 북쪽에 장례를 치렀다. 시호는 무열이며 묘호는 태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