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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3 - [분류 전체 보기] - 연산군 조선시대 제10대 왕
광해군은 어떤 왕
조선시대 제15대 왕이며 재위기간은 1608년 에서 1623년이다.
이름은 이혼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는 공빈 김 씨이며 비는 판윤 유자신의 딸이다.
간단하게 정리한 요약문
조선 제15대 왕선조의 둘째 아들. 북인이 지지하였다.
형 임해군이 있는데 선조는 덕이 없다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후 계비인 인목 대비에게서 영창 대군이 태어났다.
영창 대군을 적통이라 하여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왕위를 지키기 위해 임해군과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킴으로써 서인들의 반발을 샀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대외 정책으로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 중립 외교를 실시하여 백성들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하였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친명 배금 정책을 실시하여 1627년 정묘호란을 겪었다.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공납 제도의 문제점인 방납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양전사업과 개간사업을 실시하여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임진왜란으로 타버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정리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광해군 주요 활동들
선조의 비의 인왕 후 박 씨는 불임이었다.
대군이 탄생할 가망이 없자 신하들은 그대 안에서 세자를 정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선조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몽진이 불가피해지자
신하들의 압박에 밀린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장자 임해군은 각종 악행으로 민심을 크게 잃었기 때문이다.
급히 비난의 길에 오르는 바람에 광해군의 세자책 봉교서는 평양에서야 반포할 수 있었다.
선조가 요동 망명을 고집하자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분조를 정했다.
황태자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수개월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지를 오가며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독려하는 등 국왕의 몽진으로 흉포해진 민심을 규합하는데 기여하였다.
명나라 황제의 칙서에 따라 무군사를 이끌고 야전을 벌였다.
이에 민심은 선조를 떠나 광해군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선조는 광해군을 거세게 견제하였다.
명나라 장군을 접견하는 자리에 임해군을 동석시키는가 하면 젊은 계비에게서 마침내 영창대군을 낳는 등
광해군 세자의 지위를 심각하게 흔들었다.
또한 명나라 내부 사정으로 광해군 세자 책봉 주청은 무려 다섯 번이나 거절당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은 가까스로 즉위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국왕 책봉을 또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장자 임해군의 병세가 과연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차관을 파견하는 등
새 국왕 광해군에게 씻기 어려운 모욕을 주었다.
결국 책봉을 받았지만 장남도 적자도 아니라는 출생 신분은 광해군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즉위 초에는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고 서인과 남인에게도 두루 중직을 맡기는 등 붕당 간 조제보합을 꾀하였다.
한때 왕위 계승 경쟁자였던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존재로 광해군은 불안해졌고
이는 연이은 옥사로 이어졌다. 즉위하자마자 임해군을 역모죄로 얽어 귀양 보낸 뒤 제거하는 한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한때 보였던 전 영의정 유영경을 사사하였다.
1613년에는 계축옥사를 통해 영창대군을 같은 방식으로 제거하였다.
1618년 초에는 인목대비를 유폐함으로써 4년 이상 지속된 계축 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과정에서 영창대군이나 인목대비를 보호하려던 신하들을 대거 추방하였는데
대개는 서인과 남인이었으나 정온과 정창연 등 대북 이탈자도 적지 않았다.
계축옥사 외에도 광해군은 역모의 고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여 크고 작은 역모가 꼬리를 물고
그에 따른 각종 옥사가 끊어질 날이 없을 정도였다.
내치에서는 오랜 전란으로 지친 나라를 다스리고 전화를 복구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즉위한 그해 선혜청을 두어 대동법을 경기도에 시범 실시하였다.
광해군은 대동법에 미온적이지만
왜란 전부터 조정의 큰 사안이었던 대동법 시행을 처음 결재한 국왕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611년에는 왜란으로 대거 발생한 은결을 찾고자 하는 양전을 실시하여 수세지를 회복하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나라의 기초를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서적 간행도 활발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을 간행하고 국조보감 등을 편찬했다.
적상산사고도 새로 설치했다. 허준의 동의보감도 이때 출간됐다.
가의 체통과 왕실의 권위 회복을 위해 필수적인 궁궐 재건에도 힘써 1610년 창덕궁을 2016년 창경궁을 준공하였다.
이후에는 궁궐을 새로 짓는 데 집착하다가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기도 했다.
1619년 준공한 경덕궁과 끝내 준공하지 못한 인경궁을 들 수 있다.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무리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큰 폐해를 낳았다.
외정에서는 1609년 일본과 일본송사약조 이른바 기해약조를 체결하고 외교를 재개하였다.
1618년 봄 누르하치의 후금이 요동을 침략하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명나라는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켜 조선에도 파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홀로 파병을 반대하였으나 신하들의 압박에 밀려 강홍립이 이끄는 1만 3000여 병력을 출정시켰다.
광해군의 예상대로 조명연합군은 개전 초기에 거의 궤멸했고 강홍립 휘하의 4000여 명의 병사는 후금의 포로가 됐다.
이후 광해군은 강홍립을 창구로 누르하치와 우호적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을 배명 행위로 간주한 신료들은 사사건건 맞섰다.
이 외교노선 문제만큼은 이이첨 등이 주도하던 대북도 광해군을 따르지 않았다.
숭명배금 기조는 이미 광해군 당시 조야에 강고했다.
1622년에는 명황제가 감군어사를 직접 파견하여 조선에 추가 파병을 명하였으나
즉시 수락해야 한다는 신료와는 달리 광해군은 칙서 이행을 거부하였다.
감군어사가 빈손으로 돌아오자마자 모든 신료는 광해군과 논쟁하며 정청을 이어갔다.
그 결과 국가행정은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졌다.
고군분투하던 광해군은 화병이 심해지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혈 정변이 일어나 광해군은 국왕으로부터 폐위되어 유배되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유배지를 옮겼으나
강화도, 태안, 교동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까지 내려와 그곳에서 6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