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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에 대하여
조선시대 제10대 국왕이다.
1483년 2월에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2년가 재위하면서 무오사화 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지나치게 연회, 사냥, 음행 등 폭정을 자행하다가 중동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다.
추가로 본관은 전주이고 이름은 이융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 배경과 요약한 내용
성종의 아들이자 어머니는 판봉상시사 윤기무의 딸인 폐비 윤 씨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중종이 있었는데 중종이 태어나기 전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폐위되었기 때문에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로만 기록되어 있다.
왜인과 야인을 방어하기 위해 비융사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한 것이나 변경 지방에 사민을 독려한 것.
국조보감 여지승람 등 수정 등의 치적도 있으나 즉위 4년 이후의 실정이 너무나 컸다.
무오사화 와 갑자사화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를 희생하였다.
이 두 사화는 물론 당대 정치 세력의 대립 속에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지만
연산군 개인의 성격도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문신들의 직간을 번거롭게 여겨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을 없애고
정언 등의 언관도 폐지 또는 감원하여 여론과 관련된 모든 제도를 중단시켰다.
민간 국문투서 사건을 계기로 한글 사용이 금지됐다.
결국 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도하여 연산군 폐출 운동이 일어나 성종의 차남 진성대군이 옹립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중종반정이다.
연산군은 폐위되어 강화 교동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해 11월 세상을 떠났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연산군 즉위 무렵 형성된 중앙정치의 중요한 변화는 삼사가 중요한 관서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성종 중반부터 나타났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공신과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은 훈구 대신등을 견제하기 위해 삼사를 지원하였다.
그런 후원에 힘입어 삼사는 탄핵과 정쟁을 활발히 수행하였고
그 결과 성종 후반 삼사의 영향력은 대신을 압박할 정도로 커졌다.
국왕에 대한 다툼이 삼사의 중요한 임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삼사가 왕권도 제약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연산군은 성종 후반에 조성된 이러한 정치 상황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전제적 왕권의 구축과 행사였다.
그는 그런 목표에 저해되는 모든 발언과 행동을 능상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그 결과는 두 차례의 사화와 수많은 폭정과 강제 폐위였다.
즉위 직후부터 연산군은 수륙재의 설행, 폐모 추숭 등 여러 사안에서 삼사와 충돌하였다.
그동안 삼사의 탄핵에 위축된 대신들은 국왕을 옹호했다.
영의정 노사신은 대간의 간언을 거부한 연산군의 행동을 영주의 위엄 있는 결단이라고 칭송하였다.
삼사는 대신을 맹비난하였다. 노사신 고기가 먹고 싶다는 사간원 조순의 발언은 극단적인 사례였다.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는 이처럼 국왕·대신과 삼사의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 일어났다.
사화는 1498년 7월 11일 김일손 사초에 세조를 비판한 내용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적발되면서 시작되었다.
나흘 뒤 유자광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에 대한 역심을 담은 글이라고 고발했다.
사건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 김일손 등이 세조에게 역심을 품고 불온한 문서를 작성한 음모로 규정되어
7월 27일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등을 처형하는 등 총 52명을 처벌하면서 끝났다.
무오사화 이후 삼사가 위축되고 왕권이 강화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강화된 왕권을 국정 개혁과 같은 긍정적이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연회, 음행, 사치, 사냥, 민가 철거와 같은 부정적이고 지엽적인 사안에 소비하기 시작하였다.
국왕의 부정적 행동이 확대되자 기존 삼사뿐 아니라 대신들도 간언 하게 되었다.
1502년 3월 삼정승, 한지현, 성준, 이국균은 시폐 10조를 올려 당시 현안과 국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는
국왕이 점차 극단적인 폭정으로 치닫고 대신과 삼사가 간헐적이나마 간언을 제기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발단의 직접적 계기는 모두 능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1503년 9월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서 예조판서 이세좌가 하사 받은 술을 쏟아 국왕의 옷을 적시고
이듬해 3월 경기도 관찰사 홍귀달이 손녀를 입궁시키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무차별적 숙청이 확산되는 데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 폐모 문제는 신하들이 선왕의 잘못된 행동을 막지 못해
현재 국왕에게 엄청난 슬픔을 안겨준 대표적인 능상으로 규정됐다.
갑자사화는 여러 면에서 무오사화와 달랐다.
우선 모두 239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피화돼 사형이 절반을 넘었다.
바로 그것은 전면적이고 가혹한 숙청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대신보다 삼사가 더 많이 처벌되었으나
영의정을 지낸 한명회, 정찬손, 윤필상, 성준, 한치형과 좌의정을 지낸 이극균, 어세겸 등
주요 대신들이 사형이나 부관참시를 당해 대신들의 피해도 컸다.
갑자사화 이후 중종반정에서 폐위되기까지 2년 반 동안 연산군의 폭정과 황음은 더욱 격화되었다.
사간원과 경연을 포함한 여러 관서와 제도를 폐지하고
사냥을 위해 민가를 철거하고 금표를 도성에서 사방 100리까지 확대하였다.
기녀인 흥청 300명, 운평 1,000명을 선발하여 연회와 음행을 즐겼다.
1506년 9월 2일 반정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반정은 하루아침에 성공했고 연산군은 곧바로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에 안장되었다.
9월 24일 폐세자 이황 등 4 남도 사사되었다.
연산군은 11월 6일 역병으로 죽었으나 일단 교동에 안장되었다가
1512년 폐비 신 씨 주청에 의해 경기도 양주 해촌으로 이장되었다.
부인 신 씨는 1537년 세상을 떠나 같은 자리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