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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5 - [분류 전체 보기] - 세종대왕 왕이 된 배경과 업적 이야기
1. 장영실의 출신배경
장영실은 조선 초기의 과학기술자로 자격루, 옥루 등을 제작한 과학자 이자 기술자였다. 본관은 아산이다.
성종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산 성씨 중에 장 씨가 실려 있고
아산 장 씨 세보에는 장영실이 아산 장 씨 시조인 장서의 9 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기녀였다.
장영실 아버지가 언제 귀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아산장씨세보 기록 사이에 차이가 나타난다.
세종실록에는 장영실의 아버지가 본래 원나라 소주, 항주 지역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어난 후 조선으로 귀화했다는 것이다.
아산 장 씨 세보에서는 장영실의 9대 조인 장서가 고려로 귀화하여 아산 장 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서는 송나라 사람으로 대장군을 역임하였으며
김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을 때 송나라 조정이 주전론과 주화론의 분열로 혼란스러워지자
중국을 떠나 고려로 이주하여 아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또한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전서를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장영실 선대가 중국에서 귀화하였다는 것은
모두 인정하는 바 귀화 시기에 대해서는 실록과 아산 장씨세보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장영실의 가계에 관한 더 이상의 자료가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 정확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장영실이 어린 시절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연희실 기술에서 1421년 세종이 장영실을 불러 선기옥형 제도를 연구하게 할 당시
장영실의 신분을 동래의 관노를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의 본래 신분이 관노 즉 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경위로 관노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기녀였기 때문에 장영실도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천인이 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2. 장영실 활동 과 업적
장영실은 중국계 귀화인과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아산의 명신으로만 기재되어 있다.
동래현 관노였을 때 그의 재능이 세종에게 인정받아 중국에 파견, 천문 기기 연구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귀국하자 면천되어 1423년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어 궁중 기술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등용된 이듬해인 1424년에 물시계가 완성되었다.
세종실록에는 중국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경점의 기를 부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공로로 정5품의 행사직으로 승진했다.
1432년 경복궁과 서운관 두 곳에 설치할 많은 천문관측의기를 만드는 계획이 착수되었는데
이때부터 이천과 함께 천문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하였다.
먼저 간의와 혼천의 두 가지 기본 관측 기계를 완성하여
1437년 완성한 천문 관측의 기기로는 대간의,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규표 등이 있다.
그가 이룬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 완성된 자격루 제작이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 시보장치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 물시계를 비교 연구해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를 만든 것이다.
그 공로로 대호군까지 승진하였고 그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천상 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를 만들어 냈다.
1438년에 만들어져 흠경각에 설치된 이 옥루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모든 문헌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룬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또한 이천 등과 함께 금속활자 주조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조선시대 활판 인쇄 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
이와 보았듯이 장영실은 세종대 과학기술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핵심 인물이었다.
서거정은 필원잡기에서 세종대의 여러 장인 가운데 장영실만이 세종의 지혜를 받아 기묘한 솜씨를 발휘하였고
그 결과가 모두 세종의 뜻에 부합하였으므로 세종이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하였다.
서거정은 장영실을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해 시대에 따라 태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지만
앞서 검토한 장영실의 업적에 비춰볼 때 서거정의 평가는 과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