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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
조선전기 제1대 왕이며 이름은 이성계이다. 제위 기간은 1392 ~ 1398년이다.
태조왕에 대하여 정리한 내용
태조는 조선 초기의 첫 번째 왕이었다.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이다.
그의 이름은 이성계이며,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위화도회군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해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신진 사대부들의 적극적인 대응에 힘입어 신흥 정치 세력의 대표로 기틀을 마련하고 공양왕을 내쫓았으며
새 왕조 태조로 즉위하였다.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건너가 새 시대를 열었으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의 싸움에 실망하여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생애 활동사항과 업적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이성계는 이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큰 역할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361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가 붙잡혀 박의를 죽였다.
같은 해 홍건적이 쳐들어와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정월 2천여 명과 함께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을 침공하여 기세를 올리자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쳤다. 몇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물리치고 큰 명성을 얻었다.
1364년 최유는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봉한 덕흥군을 지원하고,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왔다.
이에 따라 최영과 함께 수원 달천에서 이들을 섬멸하였다.
이 무렵 여진족은 삼선과 삼개의 지휘 아래 동북면을 침공했고
함주까지 함락하는 등 한때 기세를 올렸다.
이성계는 그들을 크게 물리치고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 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후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 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77년 경상도와 지리산에서 맹위를 떨치던 왜구가 멸망시켰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가 도순찰사가 되어 운봉에서 아기바투가 지휘하는 왜구를 섬멸했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으로 통할 만큼 찬란했다.
1382년에는 여진인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를 약탈하였고 피해가 컸다.
이에 따라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고, 이듬해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그 후, 그는 안변책을 제안했다. 1384년에는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이듬해 함주를 침략한 왜구들은 대파했다. 1388년, 그는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때 최영과 함께 임견미, 염흥방을 주살했다.
올해는 명나라 철령위 설치 문제로 양국의 외교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요동정벌이 결정되었고, 이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정벌군을 이끌고 위화도로 갔으나 결국 회군을 단행하였다.
개경으로 돌아온 후 최영은 제거하고, 우왕은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또한 수지중과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정치적 군사적 실권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이 옹립하면서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 전국을 장악하고, 곧이어 영삼사사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신흥 정치 세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의 건국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391년, 그는 삼군도총제사가 되었다. 조준의 제안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해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했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은 원주로 추방하고 새 왕조의 태조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태조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라고 불렀고 의장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점차 새로운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면서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우선 명나라사대정책을 집필하면서 새 왕조의 국호를 명나라의 양해 아래 조선으로 확정하였다.
1393년 3월 15일부터 그는 새로운 국호를 쓰기로 결정했다.
다음으로 새로운 수도의 건설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서울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1393년 9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396년 9월까지 태묘 사직 궁전 등과 숙정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의 4대 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 홍화문의 4 소문등을 지어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1394년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각종 법전을 편찬하여 법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숭유척불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서울에는 성균관을,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여 유학을 촉진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폈다.
이와 같이 그는 새로운 왕조를 위한 기초와 기본 정책을 세웠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놓고 왕자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 세자책립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 씨의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였다.
이에 이방원의 불만은 대단했다.
1398년 태조의 와병 중에 이방원은
세자인 이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통해 그들을 살해하였다.
곧이어 그 여파를 없애기 위해 이방석과 이방번 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이방원의 요청으로 새 세자는 이방과로 결정되었다.
태조는 이방석과 이방번 형제가 무참하게 죽자 매우 슬퍼했다.
그는 곧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00년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방원이 즉위한 직후 정종은 상왕이 되었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태조는 형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매우 컸다.
태종이 즉위한 후 태조는 서울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특히 태종이 함주에 있을 때 문안사를 보낼 때마다 그 차사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선가 소식이 없을 때 말하는 함흥차사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말년에 태조는 만년에 불도에 의탁하였다.
덕안전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으며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