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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7 - [분류 전체 보기] - 동명성왕 고구려 제1대 왕
▶ 태조 왕건은 누구이고 어떠한 왕이었나
태조 왕건은 918년부터 943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던 고려전기 제1대 왕이다.
삼국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그의 지도력과 군사 기술로 존경을 받고 있다.
▶ 업적에 대한 주요 요약
태조는 고려 전기 1대 왕이다. 재위기간은 918~943년이다.
이름은 왕건으로 궁예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워 시중이 되었다.
궁예의 실상이 되풀이되자 중신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열고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흐트러진 토지제도와 조세경감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과는 정략결혼으로 연대를 강화해 왕권을 안정시켰다.
신라에 대해서는 친화정책을 펴는 한편 후백제의 뛰어난 군사력에는 화전양면 전술로 대응하여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장려하고 왕실 헌장으로 후손들에게 훈요십조를 남겼다.
▶ 생애 업적과 활동을 알아보자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석권, 철원에 도읍지를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900년 궁예의 명령으로 광주,충주,청주,당성,괴양 등 군현을 쳐 평정한 공으로 아찬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 금성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근의 10여 개 군현을 빼앗아 군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때 궁예는 금성군을 나주로 개명하였다. 양주수 김인훈이 위급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고
그동안의 전공으로 알찬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이후 궁예의 실상이 반복되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몰아내고 새 왕조 태조가 되었다.
철원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로 하였다.
태조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우선 안에서는 환선길 이흔암 등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해야 했다.
또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에서는 후백제 견훤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했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 정책은 민심 안정책이었다.
신라 말기 이후 흐트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취민유도주의 표범은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동시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유력한 호족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하여 지방 호족 및 그 자제를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태조는 궁예나 견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어
단기간에 어느 정도 신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919년 1월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후백제, 고려의 후삼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해 친화정책을 취했다.
그해 10월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는데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후백제와는 초기에 화전 양면 정책을 취했다.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신왕조의 안정과 국력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치 못했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대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이 지역은 고려도 중요시했기 때문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 부대를 대파하고 처음으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였다.
935년 왕실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 극진히 대우하고
그해 10월 신라왕의 자진 항복을 받았다.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마침내 936년 후 백제와 일선군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최후의 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 1권과 계백료서 8편을 저술하여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신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지켜야 할 절개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여겨지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죽기 얼마 전에 대광 박슬희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를 친수 하여
후계자들이 본보기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훈요십조는 태조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