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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어떤 왕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 왕이며 재위 기간은 540년~576년이다.
간략하게 정리
진흥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24대 왕이었다.
재위 기간은 540~576년이며,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551년에 왕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그는 심지어 백제와의 결혼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의 상하 지역을 정복했다.
가야 지방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국경까지 정복하여 신라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였다.
국사 편찬과 남성 중심의 화랑도 개편도 그의 업적이다.
또한 황룡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건립하고
팔관연회를 열어 전쟁에 참전한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등 호국불교의 중흥에도 노력하였다.
말년에 그는 승려 복장을 하고 그의 이름을 법운이라고 부르며 여생을 마감하였다.
주요 활동과 이룬 업적
즉위 초기에는 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551년에 개국이라 연호를 바꾸고
친정을 시작하여 대외정복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550년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병부령으로 임명된 이사부가
이듬해 두 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이렇게 확보한 한강 하류 유역의 전초기지를 바탕으로 그해 고구려가 점령한 한강 유역은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그래서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되찾았다.
진흥왕은 거칠부, 구진, 비태, 탐지, 비서, 노부, 서력부, 비차부, 미진부 등 8명의 장수를 명하고
한강 상류인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다.
553년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의 전략적 필요성을 줄이고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기습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한강 유역 전체를 점령했다.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이 초대 군주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유역을 점령한 사건은 백제와의 결혼 동맹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백제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하여 554년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신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전사하고 백제군은 거의 전멸하였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물적 자원 획득 외에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하여 564년 이후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과 북조의 북제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 관계를 강화하였다.
또한 법흥왕의 가야 정벌은 낙동강 유역까지 이르는 데 성공하였다.
555년에 완산주는 비사벌에 설립되었다.
이를 통해 아라가야와 비화가야 지역이 신라에 의해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가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백제와 동맹을 맺은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된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562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덕분에 대가야는 신라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래서 이사부는 신라를 정복하고 무력으로 멸망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 전체를 차지할 수 있었다.
565년에 대야주는 가야의 통치의 근거지이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서 설립되었다.
또한 동북쪽으로 북상하여 556년에는 비열홀주를 세우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곳으로 보아 568년 이전 어느 시점에 함흥평야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고구려, 백제, 가야를 적극적으로 정복한 결과 신라 역사상 가장 큰 영토가 되었다.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4대 순수관경비와 최근에 발견된 단양 적성비가 말해주고 있다.
4개의 순수비 중 561년에 경남 창녕군 창녕비
568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황초령비
568년에 이원군에 마운령비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북한산 위에 세워진 북한산비의 건립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신라 지역에 새로 편입된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렴하고
확장된 지역을 확인하기 위해 건립된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이러한 정복 활동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545년에는 총무성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국사 편찬과 관련된 이사부와 거칠부 모두 내물왕계의 후손이며
당시 왕실의 혈연이 상당히 높았던 점을 고려하면 국사에는 중고왕실 왕통의 전통성을 천명하고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대에 공인된 불교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흥륜사는 544년에 완공되었고 사람들은 사찰에 가서 불교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549년 양나라에서 유학한 승려 각덕이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자 백관은 흥륜사 앞에서 그를 맞았다.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왕궁을 세웠으며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보수하여 불사로 삼고 566년에 황룡사가 완공되었다.
황룡사는 574년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상을 주조하여 봉안한 신라 최대의 사찰이다.
황룡사가 완성된 해에는 지원사와 실제사도 준공되었다.
신라 왕실의 보호를 받는 불교는 도성불교적의 성격을 띠면서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외부 사찰 건립 외에도
565년 승려 명관이 진나라에서 가져온 1700여 권의 불경을 통해 교리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576년 안홍법사가 수나라에서 가져온 능가승만경 및 불사리는 수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한 572년에는 외사에서 7일간의 팔관연회를 열어 정복 전쟁 중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이것은 신라 불교가 국가의 현실적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호국불교임을 보여주는 의식이었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불교의 실질적 필요성을 줄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그 자신도 불교에 매료되어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법운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여생을 마쳤다.
왕비도 이를 본받아 영흥사에서 살다가 614년에 세상을 떠났다.
진흥왕이 이룬 업적 중 하나가 화랑도를 만든 것이다.
진흥왕은 576년 전통적인 여성 중심의 원화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하였다.
화랑도는 576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 화랑도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존재하였다.
562년 대가야 정벌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진흥왕은 신라 중흥의 군주로서 대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따라서 그는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 대외적으로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인 세 개의 독립연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 572년의 홍제가 그것이다.
재위 37년 후인 576년, 그는 43세의 나이로 죽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