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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이황

 

 

 

 

2023.01.31 - [분류 전체 보기] - 이이 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

 

이이 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

2023.02.01 - [분류 전체보기] - 신사임당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이이는 어느 시대 누구였는가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사망한 조선전기 학자, 문신이다. 강원 강릉 출생. 본관은 덕수.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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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에 대하여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이황의 요약설명

 

이황은 조선 초기 성균관 대제학 지경연의 만리장성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이다.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사망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1545년 을사사화 이후 고향인 퇴계에 살면서 선비 생활을 하였다.

그는 유명한 유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주자대전 등 주자학 관련서적을 집필하고 편찬하였으며

젊은 세대를 양성하여 영남학파와 친영남학파를 아우르는 거대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였다.

68세에 그는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사후 그를 기리는 서원을 짓고 도산서원에서 사채를 받아 위폐를 봉안하였다.

본관은 진보 자는 경호 호는 퇴계 퇴도 도수이다.

 

 

 

지세한 생애 활동과 업적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좌찬성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 때 아버지의 애도를 받았지만 아내인 생모 박 씨의 지도 아래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이우에게 논어를 배웠고, 14세 무렵부터 혼자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특히 도잠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인품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시 야당은 이황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스무 살 무렵 주역 공부에 열중해 건강을 해쳤고, 이후 병이 많이 났다고 한다.

1527년 향시 진사시와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과거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급제하였다.

1533년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와 교유하고 심경부주를 얻어 크게 심취하였다.

올해 그는 귀국길에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537년 어머니가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1539년에는 홍문관수찬이 되었고 곧 왕으로부터 사가독서의 은택을 받았다.

중종 말년,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처음 귀양 보낸 김인후는 한양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는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되자 묘소 참배를 핑계로 사가를 요청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나약함을 핑계로 모든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1546년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얽어서 산운야학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때 토계를 퇴계로 개칭되어 자신의 아호로 사용되었다.

그 후 촉탁의 명을 받아 영영 쫓겨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 관계를 떠나고 싶어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은 충청감사가 되어 오는 것을 피하고

섬기기 전에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풍기군수 시절 백록동서원이 부흥한 전례에 따라

주세붕 전 군수가 세운 백운동서원에 편액, 서적, 학전을 바치라는 감사의 뜻으로 청원하여 실현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다.

1년 뒤 퇴임하고 서쪽에 한서암을 지어 어수선한 정국을 모면하고 다시 노생에 잠입하여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1552년에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합참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사례가 20건에 이르렀다.

1560년에 도산서당이 세워졌고 아호를 도옹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동안 서당에 살면서 많은 제자들을 강의하면서 독서와 수련, 저술에 전념하였다.

명종은 이황의 예우 때문에 자주 출사를 종용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제자들과 함께 초현부지탄 이라는 시를 짓고, 몰래 도산에 화가를 보내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여기에 송인이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써서 병풍을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이황을 조석으로 흠모했다고 한다.

그 후 친정하게 되자 자주 이황을 자헌대부, 공조판서, 대제학 등의 현직에 임명하여 초빙하였으나

이황은 고향을 떠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의 사절이 오자 조정은 이황의 내경을 간절히 바라 한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명종이 급사하여 선조가 즉위하였고, 이황은 부왕의 관직인 수찬청당상경과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신병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황의 목소리는 밤낮으로 높아 선조는 이황을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하여 간절히 초청하였다.

이황은 사퇴했으나 몇 차례의 강한 부름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나이로 대제학과 조경연의 책임을 지고 선조들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선조는 하늘과 땅의 말씀이자 당금의 급선무로 잠시도 이 소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 후 이황은 정이의 사잠, 논어집주, 주역 장재의 서명 등 온오를 진강 하였다.

나이가 많아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였고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평생을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젊은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환오향을 거듭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에 전념했으나 이듬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에는 사랑하는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하고 일으켜달라 해서

단정하게 앉은 자세로 역 책하였다.

선조는 3일간 죽음을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영의정의 예에 따라 집행하였으나

산소에는 유계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라고 새긴 묘비석만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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