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23.02.01 - [분류 전체 보기] - 신사임당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이이는 누구였는가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사망한 조선전기 학자, 문신이다.
강원 강릉 출생.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 호는 율곡·석담·우재. 아버지는 증좌찬성 이원수이고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 신 씨이다.
아명을 견룡이라 하였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은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간단히 요약
이이는 조선 전기 동호문답, 인정도심설, 성학집요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문신이다.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사망하였다.
19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기도 했으나 20세에 하산하여 유학에 전념하였다.
이후 총 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다.
1568년 천추사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고
1583년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와 십만 양병설 등 개혁안을 올렸다.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도 힘썼으며 주자학의 핵심을 요약한 성학집요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자세한 배경과 활동들
여덟 살 때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가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1548년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시묘하였다.
이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고, 1555년 20세 때 하산하여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1557년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 봄 예안 도산으로 이황을 방문하여 그해 겨울의 별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9차례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리었다.
1561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564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1568년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였으며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19세 때부터 친분을 맺은 성혼과 지성여중 및 안자격치성지설 등 주자학의 근본 문제들을 논하였다.
1569년 왕에게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2년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정도심 등을 논하였다.
1574년 우부승지에 임명되어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를 올렸다.
1575년 주자학의 핵심을 요약한 성학집요를 편찬하였다.
1577년 아동 교육서인 격몽요결, 1580년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를 편찬하였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면서 어명으로 인심도심설을 만들었다.
그해 김시습전을 쓰고 학교 모범을 지었고
1583년 시무육조를 올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 양병을 주청 하였다.
1584년 서울 대사동에서 영면하여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