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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에 대한 용약정리
연개소문은 대대로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은 미상이고 665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대대로는 고구려의 제1관등 벼슬이다.
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 즉위와 관련이 깊은 장수 이자 관리인이며
고구려 말기 권력의 집권자로 알려져 있다.
국내 정치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중국에 맞서고
고구려를 위기로부터 지키려고 애쓴 장수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압박하자 고구려에서는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을 맡았는데 이때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반대파를 몰아내었다.
그 후 보장왕을 왕으로 세운 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 자리에 올라갔다.
연개소문은 독재정치를 펼치면서 당나라, 신라와 같은 외국에 대해 강경책을 강구하였다.
백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에서 김춘추를 파견하여 도움을 청한 적이 있는데
연개소문은 한강 유역을 반환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였다.
신라 공격을 중단하라는 당나라의 간섭에 대항하다 당나라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연개소문 정권은 당나라의 침입에 맞서 민족을 지켜내었다.
또한 연개소문은 도교를 장려하고 중국에서 도교 승려인 도사를 불려 들였고
당시 귀족들은 불교를 주로 믿었기 때문에 귀족과 결탁한 불교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도교를 내세웠던 것이다.
도교에서는 불로장생이나 신선사상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거다.
그러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승려 보덕은 열반종을 개창하였고
열반의 세계는 영원한 세계이고 보덕은 신선의 경지가 불교에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생애 활동 자세한 이야기
그는 인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였다고 한다.
동부 어른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였다.
유력 귀족들은 그의 세력과 무단 기질을 두려워하여 반대했으나 귀족들에게 호소하여 가까스로 승인을 얻었다.
이후 그는 천리장성을 쌓았을 때 최고 감독자 였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많은 대신들과 영류왕들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챈 그는 642년 평양 성남 쪽 성 밖에서 부병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불러 정변을 일으키고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해 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스스로는 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안시성 성주도 연개소문 반대파였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았고 양측 간 타협으로 일단락됐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고 대신 안시성주는 새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다.
안시성주와 타협이 보여주듯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 귀족 연립정권 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인 대대로를 5부 귀족이 선임하였다. 3년에 한 번 선임하고 연임도 가능했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할 때 귀족 간에 의견 일치가 보이지 않는 경우 여의치 않으면 각각 무력을 동원하였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이 없어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정변은 때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연개소문 집권 과정에서 나타나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은 그런 사정의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지위 세습으로 볼 때 연 씨 일가의 세력은 크게 강화됐다.
집권 후 그는 종교 정책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숙달 등 8명의 도사를 맞아 도교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놓여 있었고
수나라와의 20여 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 멸망으로 종결된 후 한때 중국 세력과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에는 수나라와의 전쟁 때 발생한 양측 포로와 유민의 상호 교환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수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양국 관계는 긴박해졌다.
서쪽으로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북쪽으로 돌궐을 격파 복속시킨 뒤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 정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켰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면서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서부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 간의 충돌이 잦았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한강 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 삼국 간의 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국제적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했다.
이는 극심한 정변을 통해 집권한 그의 대내적 정치적 입장과 관련이 있고
그는 대외적 위기 상황은 정권 안정화와 집권력 강화를 꾀하는 데 오히려 유리하다고 파악했다.
그는 신라 김춘추가 제안한 양국의 평화를 거부하고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당나라의 압력을 거부하고
사신을 가두기도 하였다. 이 같은 대외정책은 당에 대해 단호한 대결자세를 다짐으로써 항쟁의식을 높였다.
또한 말갈족과 같은 휘하의 복속 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지는 645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군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 사이는 전쟁 중 수나라와의 관계처럼 전쟁이 불가피했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규정해 온 다원적 세력 균형 상태가
중국 대륙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하면서 무너졌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고자 함으로써
수, 당 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에는 중국의 내부 사정과 당나라와 돌궐과의 관계로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지방을 선제 공격하여
수나라와의 싸움의 계기가 된 것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다.
그는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하여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했듯이 당태종이 침공해 오자
당시 몽골 고원에서 돌궐 대신 흥성한 설연타의 세력과 연결하여 당의 후방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어 현재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공화국 사마르칸드 지역에 있던 강국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모색했다.
이때 파견된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사마르칸드 시 외곽에서 발굴된 아프라시앞 궁전 벽화에서 발견됐다.
이 같은 정책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인식에서 나온 것이나
이를 수행함에 있어 탄력성이 결여된 경직성을 보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의 주장과는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을 기획함으로써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상대방과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른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경직된 모습을 보여준다.
안시성 인근 평원에서 고연수, 고혜진이 이끌던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 세력과 연결해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나라군과의 정면 회전을 꾀한 것은 연개소문 집권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젊은 장군을 기용해 한꺼번에 당나라군을 격파함으로써 새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강경한 지도 노선은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 상황에서 강력한 통합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이 되어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당군의 지속적인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 속에서 주요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에까지 밀려난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 최고 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665년 그가 죽자 그의 장남 남생이 그의 직을 계승하고 남건, 남산 등이 권력을 나누었다.
곧 일어난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나면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