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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조왕 박혁거세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

 

 

 

 

박혁거세는 어떤 왕인가

 

신라를 세운 왕이다. 알에서 태어나 경주 지역을 다스리던 여섯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신라의 왕이 되었다.

성이 박 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제위기간은 BCE 54 ~ CE 4년이다.

 

 

 

탄생과 간추린 이야기

 

기원전 69년경 한반도 남동쪽에는 여러 부족국가가 모여 연맹을 이룬 진한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짙은 가운데 경주 지방에는 모두 여섯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알천의 양산촌, 석산의 고허촌, 무산의 대수촌, 취산의 진지촌, 금산의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이 있었다.

여섯 마을 이장은 회의를 열어 나라를 세우자는 뜻을 모았다.

그러려면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셔야 했다. 이장들은 먼저 높은 곳에 서서 세상을 둘러봤다.

이장의 눈에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고 있는 흰말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워지니 흰말은 크게 울면서 하늘로 올라갔으며 흰말이 있던 자리에는 보라색 알이 있었다.

이장들이 조심스럽게 알을 만지작거리자 껍질이 갈라지고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촌장은 하늘에서 임금을 보내준 줄 알고 사내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로 지었다.

혁거세는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박 씨와 같은 알에서 나왔으므로 성은 박 씨가 되었다.

혁거세는 촌장의 손에서 무럭무럭 자라 기원전 57년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인데 서라벌은 신라의 옛 이름이다. 혁거세는 61년여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하늘에 올랐다고 한다.

또한 육촌장이 박혁거세를 왕위에 올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는 혁거세와 여섯 부족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혁거세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처럼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이는 나라를 세운 임금이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신성시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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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자세한 이야기

 

서기 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 6촌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였다.

그들은 왕을 섬겨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흰말 한 마리가 웅크리고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이 하늘로 날자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런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에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서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다.

알의 크기가 박과 같아 성을 박 씨라 하였다.

또한 그 광채에 따라 이름을 혁거세 또는 불구내라 하였다.

고허촌 촌장인 소벌공이 데려가 키웠으며 6촌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존경했다.

나이 13세가 되자 이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이라 하였다.

또한 나라 이름을 서나벌, 서라벌, 서벌 또는 사라, 사로라 하였다. 그리고 서기 53년 알영을 비로 맞이하였다.

이 건국신화는 성읍국가의 단계를 반영한다.

육촌장이란 이미 신라 개국 이전에 나뉘어 살았던 고조선 유민이었다.

토착 세력을 압도한 유이민 박 씨 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박 씨 집단은 말 및 천신하강의 모티브로 볼 때 이들은 말을 토템으로 하는 천신족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혁거세, 불구내 등이 광명을 의미한다는 데서도 이들의 태양숭배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개국연대 이전부터 경주지역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개국연대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라는 설은 문제가 있다.

첫째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결정한 것이 그렇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가 참위설인 갑자혁명설에 입각한 것 같기 때문이다.

혁거세는 서기 37년 경주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 하였다.

서기 32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 단계의 사로국은 대체로 경주평야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곡식더미가 들판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 라며 스스로 물러났다.

서기전 20년 마한왕이 공물을 보내지 않는다고 화를 내자 그해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서기 19년 마한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 조위하였다.

서기 5년에는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마리를 바치기도 하였다.

승하한 뒤 사릉에서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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