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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고 주몽
동명성왕 고 주몽

 

 

 

 

 

동명성왕

 

삼국시대 고구려 제1대 왕.

주몽으로도 알려진 동명성왕은 삼국 중 하나인 고구려의 창시자이다.

그는 한국 역사와 문화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요약정리문

 

동명성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첫 번째 왕이었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이며, 광개토왕릉비의 추모왕으로 불렸다.

그의 이름은 고주몽이며, 천제의 아들인 북부여의 왕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부 지역의 금와왕 왕자들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졸본으로 가서 수도를 정하고 고구려를 세웠다.

이듬해 비류국 송양왕이 항복하여 행인국 북옥저를 평정하여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기원전 19년,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예씨 와 유리 왕자가 도망해 오자 태자로 삼았다.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나 용산에 장사 지내고, 그의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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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알아보자

 

그의 성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 고씨였다.

그 이름은 또한 주몽, 추모, 상하, 추몽, 중모, 그리고 도모라고 불립니다.

국사에서 고구려 시대의 원형을 인용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성은 고, 이름은 주몽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추모" 또는 "상해"라는 이름도 전해진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와 모두루묘비는 "추모왕"이라고 불렸다.

또한 백제의 시조로 모셔진 동명에 대해서는 '신찬성씨록' 등 일본 문헌에 도모로 기록되어 있다.

이 일련의 한자들은 모두 같은 이름을 다른 문자로 쓴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한편, 중국 문헌 위략, 후한서, 부여전, 양서의 고구려전 등에서는 부여의 시조가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그 외에도 위서, 주서, 남사, 북사, 수서 등 고구려의 시조가 주몽이라고 한다.

아마도 시조와 같은 이름을 섬기는 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동명과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문헌 기록만 놓고 보면 주몽 설화와 동명 설화의 줄거리가 같다.

그 특징은 단군의 전통처럼 왕자의 정치적 권위의 원천을 하늘에 귀속시키면서

농업생산을 지배하는 '물의 신령'의 권위를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적 사회적 특성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이자 북부여의 왕인 해모수였다.

이는 그가 비록 동부여에서 태어났지만 고구려 왕실의 법치주의의 기원이 북부부에 있음을 보여준다.

즉 주몽의 어머니 하백의 딸 유화부인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정을 통하다가 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때 동부여의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만났다.

태백산 남쪽에 있는 유화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방에 가두었더니

햇빛이 따라와서 커다란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 버려도 소와 말은 피했다.

들판에 버리자 새들이 모여들어 날개로 덮었고, 알을 깨려고 했지만 깨지지 않아 결국 유화 부인에게 돌려주었다.

알을 덮어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소년이 껍질을 깨고 나왔다.

소년의 골격과 외모는 화려하고 기이했다.

이미 일곱 살 때 활과 살을 직접 만들어 쏘았는데 모두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여 이름을 주몽이라 한다.

금와왕에게는 7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장남 대소는 "장래의 문제가 두려워 제거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했다.

주몽은 날랜 말에게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살찌게 하니

왕은 살찐 말을 골라타고 주몽에게 여윈 말을 주었다.

왕자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 하자

유화부인은 "도망쳐서 큰일을 해라."그러므로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을 데리고 엄체추에 이르렀다.

이때 주몽이 강에게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따라 쫓아오는 병사가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는가?" 하니 물고기와 거북이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이 건너가자 곧 뿔뿔이 흩어져 쫓기는 군사들은 건너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비둘기 한 쌍을 보내 보리씨를 전해주었다.

또한 모둔곡에서는 재사, 무골, 수거 등 세 사람의 신하를 얻었다.

졸본에 수도를 정하고 비류수 위에 집을 짓고, 기원전 37년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고 불렀다.

기원전 36년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았다.

기원전 33년 태백산 동남쪽 행인국이 패하여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만들었고, 기원전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게다가 유화부인은 기원전 24년에 죽었고, 동부여왕 금와왕 후히 장례를 치러줬기에 사신을 보내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기원전 19년,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예씨와  유리 왕자가 동부여에서 도망해 오므로 태자로 삼았다.

그해 9월 왕이 세상을 떠나자 용산에 장사를 지내고 그의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졸본으로 와서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몽설화는

첫 번째 여인이 갇혔을 때 태양이 그 위를 비추어 태기가 생겨

둘째 알을 낳고 셋째 탄생지에서 도망치고 넷째 물고기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다섯 번째 새로운 땅에서 왕이 되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중 첫째는 단군과 마찬가지로 주몽이 천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머니 유화부인은 단군의 어머니인 곰이 동굴에 갇힌 것처럼 방에 갇혀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주몽설화나 동명설화는 단군의 전통에서 볼 수 없었던 네 번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가 하백의 외손으로서 물의 신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비를 다스리는 주술적 능력을 의미한다.

즉 단군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새로운 농경사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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